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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6-13 20:50:02




김영길 장로의 본가인 경북 안동군 길안면 지례동 지곡제택 전경. 사진은 수몰 전 모습이다.



“어리석어도 좋으니 어질어라.” 안동 김씨인 우리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르침이다. 아버지는 자기 이득과 욕심만 차리면서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보다는 콩과 보리도 구별 못하는 숙맥불변(菽麥不辨)의 바보일지라도 차라리 정직하고 어질게 살라고 가르치셨다.

그러고 보면 고향 안동의 지례마을은 숙맥들이 많이 살던 곳이었다. 첩첩산중이라 마을 사람들은 “임금도 하마(下馬)를 해야 들어올 수 있다”며 농을 했다. 하도 오지여서 자동차보다 비행기를 먼저 봤다.

고향집은 350년 연륜이 쌓인 고택이다. 이름하여 지례동 양동댁이다. 경북 문화재 민속자료 58호로 지정돼 있지만 안동 지역의 수많은 고택과 비교하면 그리 특별할 게 없는 옛집이다. 고향집은 조선 현종 4년(1663년)에 건축해 안동군 길안면 지례동 629번지에 있던 것인데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수몰 위기에 처하자 임하면 임하리로 옮겼다.

‘양동댁’은 경주 양동 회재 이언적 선생의 후손인 어머니 이귀복님이 수산(秀山) 김병종님의 아들 운전(雲田) 김용대님과 결혼해 안동 지례동으로 시집 왔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집안 어른들은 ‘예를 안다(知禮)’는 마을 이름처럼 인성을 중요시하는 유교적 마을 공동체를 일구며 학문을 벗 삼고 교육을 통해 세대를 이어오셨다.

선친 김용대님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심대(心臺) 김세동님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12세 되던 해에 20여촌이 넘는 지례의 김병종님 양자로 오게 됐다. 이후 지례에서 4남4녀의 자녀를 낳고 1995년 별세했다. 생가 조부 김세동님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봉 김성일 선생의 12세손이었다. 독립운동을 하면서 독립군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여러 지역을 왕래했다. 이 때문에 일곱 번이나 옥고를 치렀다. 생가 증조부 김병락님도 일본군 분소 습격 사건 등의 의병활동으로 10년간 옥고를 치렀다. 93년 조부님과 증조부님께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양가 조부 김병종님은 청계대조(김진)의 장남인 약봉부군 김극일 선생의 12세손으로 퇴계의 정신과 학문을 정통으로 이은 성리학자였다. ‘성학속도’ ‘문소가례’ ‘학림통독’ 등의 저서를 남기는 등 안동유림, 나아가 영남유림이 인정하는 당대의 이름 있는 유학자였다.

내가 과학자의 길을 선택한 것은 과학을 홀대한 것으로 흔히 평가되는 조선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유감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치국과 평천하에 앞서 ‘인격 수양’을 강조하는 유교 전통을 안고 과학의 길로 나아간 것이었다. 전환기 시대정신에 맞춰 교육을 통해 외래 문물을 수용하고자 했던 아버지의 유연하면서도 과감한 실천 유학 정신에 힘입었다고도 할 수 있다. 기독교 정신 역시 나의 정체성을 형성했다. 흔히 기독교와 유교는 반목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기독교 신앙을 추구할 수 있었던 것은 유교, 특히 퇴계학이 가진 일말의 종교적 메시지(하늘사상)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과학자로서 외국을 넘나들며 세련된 삶을 살아온 것 같지만 내 정신의 DNA는 바로 ‘지례동 양동댁’에서 형성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 선조들은 지례로 찾아들었을까. 그들에겐 ‘산 속에 홀로 있어도 천하를 생각한다’는 유교적 신념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지금은 과학의 시대다. 유교와 전통, 현대와 미래, 교육과 과학 그리고 기독교. 어쩌면 지례동 양동댁이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주제를 던져주고 있는지 모른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