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진 까닭은 치질?

경희대 의대 교수 가정의학 전문의 | 제120호 | 20090628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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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방영을 시작한 드라마 ‘결혼 못하는 남자’가 신선한 재미를 주고 있다. 첫 회에서 남자 주인공이 치질로 응급실에 실려와 내과의사인 여주인공의 진료를 받게 되는 장면에선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도 공감한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난생 처음 본 여의사가 바지를 내려 보라고 주문하자 당황한 남자 주인공이 병원을 도망 나왔다가 고통으로 다시 쓰러져 결국 바지를 내리고야(?) 마는 장면 말이다. 그만큼 치질의 고통은 수치심에 비할 바가 아니다. 강영숙씨의 소설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에서도 치통보다 실연의 고통이 더 크지만 그보다 더 심한 통증은 치질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전한 이유 중 하나가 심한 치질로 인해 말을 타고 진두지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란 주장이 있을 정도로 치질은 매우 고통스러운 질환이다.

치질(치핵)은 직장 하부 혹은 항문에 있는 정맥들이 붓고 늘어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 정맥들은 변을 보면서 과도한 힘을 줄 때 늘어나고 붓게 된다. 출산 시 치질이 심해지는 것도 같은 이치다. 임신 중에도 치질이 잘 생긴다. 커진 자궁이 직장 하부나 항문 주위의 정맥을 눌러 혈액이 간(肝)이나 심장 쪽으로 올라가지 못한 채 고이기 때문이다. 또한 간경화가 심해 항문 주위의 혈액이 간 쪽으로 잘 올라가지 못해도 치질이 생길 수 있다.

반면 화장실에서 배변 시 신문 등을 읽는 습관은 치질의 빈도를 약간 증가시킬 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는 보고가 있다. 하지만 배변 중 담배를 태우는 분들은 주의해야 한다. 이런 습관은 치질을 유발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혈관 확장 작용이 있는 술도 과도하게 마시면 치질이 심해질 수 있다.

치질은 50세 성인의 절반이 갖고 있다고 할 만큼 흔한 병이다. 우리나라 병원에서 가장 수술을 많이 하는 질환도 치질이다. 치질의 가장 흔한 증상은 대변을 본 후 선홍색 피가 휴지에 묻거나 변기에 떨어지는 것이다. 간혹 피가 대변 위에 묻어 나오기도 하지만 변에 섞여 나오지는 않는다. 선홍색 피가 변에 섞여 나오는 경우라면 항문이나 직장 하부보다 더 윗부분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 예를 들면 대장암이나 장염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피가 선홍색이 아니라 검은색인 경우도 치질보다 장의 좀 더 위쪽 부분에 탈이 생겼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희귀병인 항문암이 생겼을 때도 치질과 같은 양상으로 피가 나올 수 있다. 이 때문에 드라마에서처럼 항문경 검사를 받아 볼 필요가 있다. 물론 드라마에서처럼 바지를 다 벗을 필요는 없다. 바지를 반쯤 내린 상태에서 검사가 가능하다. 나이가 50세 이상이거나, 젊더라도 대장암의 가족력이 있다면 치질 같은 양상으로 피가 나오더라도 대장내시경검사를 받아 보는 것이 좋다. 간혹 단순히 치질이려니 생각하고 지내다가 늦게야 대장암으로 진단받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치질 중에서도 직장 하부에 발생하는 내치질(소위 ‘암치질’)은 피가 잘 나지만 통증은 대개 동반되지 않는다. 반면 항문에 생기는 외치질은 출혈보다 통증이나 가려움증을 더 많이 호소한다. 만약 대변을 볼 때 통증을 동반하면서 선홍색 피가 항문으로 나온다면 치질보다 대변을 볼 때 항문이 찢어지는 ‘치열’의 가능성이 더 많다.

치질은 인간이 직립보행을 시작하면서 생긴 것이라고 한다. 인간이 자신의 부끄러운 곳을 감추기 위해 사지보행을 단념하게 됐고, 그 결과 자존심은 세울 수 있었지만 치질이란 고통을 동시에 얻어 살게 된 셈이다. 그러나 위험 요인을 알고 잘 관리한다면 직립보행을 하면서도 치질 없이 살아갈 수 있다.
 

[출처] 원장원의 알기 쉬운 의학 이야기 : 치질 (펌)|

* 주) 원장원 교수는 서울의대 기독동문회 회원이다. 현재 경희의대에서 가정의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특히 노인의학 분야에 연구를 많이 하고 있다. 저자의 허락을 받고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