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승의 시 「절대 신앙」


                                                                      < 정 재 영 >


 김현승의 시 중에서 대표작을 추천하라 하면「가을의 기도」,「눈물」,「절대 신앙」을 말할 수 있다. 시를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쉽게 동의할 것이다. 개인적인 선호겠지만 창작론의 입장에서 본다면  단연 「절대 신앙」이 그 백미를 꼽는다고 말하고 싶다.


  당신의 불꽃 속으로

  나의 눈송이가

  뛰어듭니다

 

  당신의 불꽃이

  나의 눈송이를

  자취도 없이 품어 줍니다 

 

                               - 김현승의 「절대 신앙」전문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법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여 생각할 수 있다.

작품에 담은 내용을 알아보는 것과 내용을 표현하는 창작기법을 살피는 것이다. 시도 언어를 가지고 표현하는 예술이라는 면에서 볼 때, 매 한가지다.                        

 이 시는 두 연으로 구성된 아주 짧은 시다. <당신과 나>, <불꽃과 눈송이>라는 명사와 <뛰어들다>와 <품어주다>라는 두개의 동사로만으로 이루어졌다. 절대 신앙이라는 관념적 사고를 이토록 적은 언어를 가지고 쉽고 확실하게 표현해 준다는 것은 아마 김현승 시 아니고는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 이유를 설명하려면 현대시의 특성 중 하나인 모더니즘이라는 예술사조의 내용을 먼저 이해해 할 필요가 있다. 왜냐면 시대마다 요구되는 창작론이 있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의 특성 중 하나는 과학적 태도다.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와 달리 모더니즘은 일종의 시대적 특성을 배경으로 가진다. 즉 과학지상주의의 영향을 받아, 보이지 않는 관념이나 정서는 의식이 불안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태도이다. 성경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행위, 즉 실상으로 보여주는 행위를 모더니즘이 요구하는 특징이다. 시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사물로 바꾸어 표현한다. 이것을 문학용어로 변용이라 한다.

 변용의 뜻풀이는  ‘얼굴 바꾸기’ 정도인데,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직접 설명하지 않고 다른 말로  둘러댄다는 뜻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여호와는 목자’라는 시편의 말을 예로 들면 아주 쉽게 설명할 수 있겠다. 여호와는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다.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목자’는 누구나 눈으로 볼 수 있다. 원래의 불가시성의 여호와가 가시적인 목자로 변용된 것이다. 이처럼 여호와의 본질적인 의미를 원관념이라 하고, 목자라는 비유적 대상을 보조관념이라 말하는데, 시에서는 원관념에 대한 적절한 보조관념을 골라 사용해야 문학성을 살릴 수 있다. 엘리엇은 말하고자 하는 본뜻을 대신 말해주고 있는 목자와 같은 대상을 소위 객관상관물이라고 말했다.

 

 문학창작이론을 간단히 마무리하면서 본문의 시를 감상해 본다.

 '당신의 불꽃'이 뜻하는 바는 하나님의 품이다. '나의 눈송이'는 화자(시인)의 신앙이다. '눈송이'가 '불꽃 속에 뛰어든다.'는 것은 결국 불꽃 속에서 단 한 방울의 물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은밀히 암시적으로 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하나님 품에 모든 것을 맡겨 인간이라는 사고나 존재는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는, 하나님과 완전한 합일을 불꽃 속으로 뛰어드는 눈송이로 빗대놓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불꽃은 성령의 상징성을 가지며, 눈송이는 인간의 냉철한 이성을 비유한다고 말할 수 있다. 지성과 이성을 성령의 의식으로 합일시키는 모습은 신학적 해석으로도 의미가 있다.

 시인이 여기에서 눈송이나 불꽃에 대해여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빗대어 하나님의 넓은 품과 신을 완전히 신뢰하는 인간이 하나가 되는 믿음의 관계를 눈송이와 불꽃의 관계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앞서 말한 하나님에 대한 객관상관물은 불꽃이고, 시인의 무조건적 신앙은 눈송이가 객관상관물이다. 즉 원관념은 절대 신앙이고, 보조관념은 불꽃과 눈송이다.

 이렇게 그림을 보는 듯 언어로 그려 만드는 것을 형상화라 하는데, 이것은 과거에 체득한 심상 (心象 )에서 기인한다. 김현승이 기독인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늘 묵상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이런 시가 가능하다. 신비한 영적인 세계를 자연에서 볼 수 있는 과학적 현상을 가지고 치환시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문학에서는 이것을 천상적 이미지를 지상적 이미지로 바꾼다고 말한다. 즉 육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아예 인정하지 않으려는 현대 과학주의 의식과 일맥상통한다.

 

 만일 시인이 다음과 같이 시를 만들었다면 그것은 시의 특성을 도외시한 설명, 즉 형태는 시와 같으나 표현기법은 지시어에 지나지 않는 산문일 뿐이다.

 

  하나님의 품속에

  저를 

  모두 맡깁니다.

 

  하나님은

  저를

  무조건 받아주십니다.


 이와 같이 표현한다면 화자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기는 쉬우나, 어디까지나 위 글은 시의 형태만 가진 정보를 전달하는 산문에 지나지 않는다. 시의 언어는 내포적이고 함축적인 언어야 한다. 그 이유는 언어가 가지는 인식의 한계를 넘고자하는 데서 온다. 즉 언어나 언어의 의미망이 부족한 현대에는 더욱 그렇다. 어찌 마음속의 복잡, 미묘한 상태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있겠는가. 그것은 유능한 심리학자도 전혀 불가능할 것이다.

 시는 대부분 감성의 세계를 말한다. 그러기에 비유들을 사용하여 변용시켜 놓으면 객관상관물이 가지는 특성상 현실감을 강열하게 느끼게 해준다. 그래서 확실한 사물이나 사건으로 둘러대 보여주려고 한다. 이것을 시각화라고 하는데, 미술 뿐 아니라 현대시에서도 기본을 이루는 골격이다. 이런 면에서 김현승의「절대 신앙」은 내용과 함께 창작기법에서도 아주 뛰어난 작품이다.

『절대 신앙』은 그가 하나님 존재에 대한 의구심으로 믿음에서 좌절할 때 만든 『절대 고독』과 대비된 시다. 일반 문학에서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 인간의 철저한 고독을 노래한  『절대 고독』이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더 유명하다. 그러나 기독인들은 평가가 다르다. 김현승 시인이 육체적인 병환을 통해 다시 신의 존재를 확인하며 절대적 신뢰관계로 회복된 신에 대한 철저한 믿음을 고백한 이 『절대 신앙』이라는 작품이야 말로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을 떠나 내용이나 창작기법에서 볼 때, 우리 문학사에 우뚝 서있는 명시인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결론은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인 신앙을 고백하는 시인의 음성 앞에 이 시를 읽는 자들은 모두 <아멘!>으로 화답할 수밖에 없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