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예수님>

 

나는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밀양에서 열렸던 S.F.C.(학생신앙운동) 여름 수련회에서 저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제가 찾지도 않았는데도 저를 먼저 찾아오신 예수님의 사랑은 너무나 크신 것이었고 그제야 비로서 저는 저의 가족이나 저의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저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까지 제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모두 저의 가정환경과 주위의 모든 것들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저에게는 전혀 책임이 없다고 생각했었고, ‘나는 왜 남들처럼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지 못했을까’ 원망만 하고 있었던 것이 저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수양회를 통하여 처음으로 저의 죄에 대하여 깨닫게 되었고 그러한 내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며, 나의 죄 때문에 죽으시고, 나를 살리기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 후 교회생활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으며, 가정에서의 어려움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요즘 과외다 뭐다 해서 주일에도 아침예배만 얼른 드리고는 학원으로 독서실로 대달리는 크리스천 고등학생들, 또 그렇게 내 모는 부모님들이 많다고 들었다. 나는 생각해 본다. 그들의 감수성 많은 고등학교 시절에 끈끈한 신앙의 경험들을 갖게하지 않으면 언제 할 것인가? 입시에 노예가 되고 학원과 과외에 노예가 된 학생들이 장성하여 사회의 일군들이 되었을 때, 그들이 다시 사회제도의 노예가 되고, 기득권과 돈의 노예가 되리라는 것은 너무나 눈에 빤히 보이는 일이다.

 

<대학생활에서 학문의 길을 선택하기까지>

 

나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입학하면서부터 가정교사를 시작했다. 또한 나의 대학시절은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했다기 보다는 서문교회 대학부를 졸업했다고 할 만큼 교회 대학부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특히 이 때 서문교회를 담임하셨던 김만우 목사님께서는 항상 ‘20년후’를 외치시면서 한국사회와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비전을 가진 신앙인이 되기를 강조하셨다. 나는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학부에서 좋은성적을 얻지 못해 불투명한 장래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지만 나의 꿈은 미국에 유학하여 계속 공부를 해보고 싶은 것이었다. 사실 학부 때는 교수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고 또 교수가 되려면 학점관리를 잘 해야 한다는 인식이 부족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부를 계속하는 쪽으로 싸인을 보내 주셨고 그래서 미국 유학준비를 하면서도 계속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도했다.   그런데 크게 기대하지 않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지원했던 M.I.T.에서 입학허가서가 왔다. 하나님께서 보내시기로 작정하신 것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전쟁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니” 라는 고백이 절로 나왔다.

 

M.I.T.에 입학하고 보스턴에서도 나는 “공부를 해야하니 교회 청년회 등의 성경공부에 나갈 수 있을까?”라고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하바드 대학 근처에 있는 케임부릿지 한인교회를 다니게 되었는데, 유학간 첫 주부터 성가대, 청년부, 등을 찾아 다니며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 바라는 마음으로 공부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논문실험에서도 좋은 결과들을 얻게 축복해 주셨고, 6번을 합격해야만 졸업하는 졸업자격시험에서도 6번만에 패스할 수 있게 해 주셨다. 한국에서는 한번도 꿈꾸지 못했던 All A 도 받게 해 주셔서 5.0 만점으로 졸업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지혜로 된 것이 아니고 그를 의지하고 섬기려할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분에 넘치는 축복이었다고 확신한다. 

 

내가 다니던 케임부릿지 한인교회 청년회에는 한국에서는 전혀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던 청년들이 많이 있었다. 이런 청년들이 매주 금요일마다 계속되는 청년회 성경공부와 기도회, 혹은 수련회를 통하여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만나게 되고 그를 주인으로 고백하는 것을 보는 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주님의 역사였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내가 다니던 케임브릿지 한인교회 출신이 내가 속한 서울대 화학과에만 6명이나 교수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분들 대부분은 공부만 한 것이 아니라 열심히 교회 봉사하고 캠퍼스에서 학생들과 함께 성경공부하던 신실한 믿음의 용사들이었다. 

 

박사후 연구원을 계속 M.I.T. 에서 하는 바람에 보스턴 생활을 7년째 계속하면서, 하나님께서 장차 내가 어떤일을 하기 원하실까 기도하기 시작했다. 나는 유기화학을 계속 공부하고 싶었고,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직장을 구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1990년 펜실배니아에 있는 Merck라고 하는 제약회사의 연구소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 회사는 세계 1,2위 규모의 제약회사로서, 박사학위를 가진 연구원만 약 2천명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나를 지도하셨던 김만우 목사님이 계시는 필라델피아 제징장로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곳에서도 우리 부부로 하여금 말씀을 전하라는 소명을 상기시켜 주셨다. 그래서 우리 가정에서 성경공부 모임을 시작하게되었다. 미국에서의 7년 보스턴 생활과 5년의 펜실배니아 생활 중 신기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가 가는 곳마다 캠퍼스에서 당신의 일을 하도록 나를 부르셨던 것이다. 내가 있던 연구소 근처에는 대학이 없어서 학생들과 함께 사역할 일이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가 살던 곳에서 한참 떨어진 Saint Joseph대학의 한국학생들 성경공부를 도울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 후 펜실배니아 대학의 S.F.C. 학생들의 성경공부 모임인 U. Penn S.F.C. 의 모임을 돕게 되었다. 매주 목요일 저녁 왕복 80Km 의 거리를 운전하며 다니는 길이었지만, 캠퍼스를 사랑하며 교포학생뿐아니라 미국학생들까지도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이 모임을 오가는 길은 항상 기도와 찬양이 넘치는 은혜의 시간이었다. 특히 이 모임에 참석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아마 옆에서 지나가는 운전자들이 보면 ‘저 친구 좀 정신 이상한 게 아닌가’할 정도로 차안에서 큰소리로 기도하고 찬양하며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은혜의 드라이브 코스였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모교 서울대 화학과에서 나의 전공분야의 자리가 날 것이라는 소식과 함께 한번 지원해 보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았다. 우리 부부는 이 문제를 놓고 6개월 동안 기도했다. 그렇게 기도하던 중 내 마음에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시기를 원하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 마음에 소원을 두신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결국 1995년 9월 나는 모교의 강단에 서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 학원에서의 부르심>

 

미국 유학 12년만에 서울로 돌아오게된 나는 처음에 모든 것이 낯설었다. 길거리를 메운 자동차들의 홍수에 놀랐고, 골목 골목마다 차고넘치는 음식점과 노래방, 향락업체들을 보고 과연 우리가 이만큼 잘 살게 된 것인가 생각해 보게되었다. 그리고 한국에는 왠 귀신들이 그렇게 많이 날뛰는지, TV에서, 영화에서, 청소년들의 농담에까지 귀신이야기가 등장한다. 이런 때 하나님께서 나를 이 캠퍼스에 보내신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단지 새로운 지식을 강의하고 연구만 하는 일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희어져 추수하게 된 이 캠퍼스를 바라보며 ‘추수할 곡식은 많으나 추수할 일군이 부족하다’고 하는 말씀을 나에게 들려주시며 추수할 일군으로 캠퍼스로 부르신 것을 나는 확신한다.

 

그런데 내가 서울대에 와 보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보내신 교수님들이 여러분 계셨다. 김석산 교수님과 우규환 교수님, 그리고 강신후 교수님 등을 주축으로 하여 몇년전부터 매주 금요일 아침 7시에 모여 서울대 복음화와 민족과 세계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드리는 모임이 있었고, 또 손봉호 교수님, 원호택 교수님 등을 중심으로 기윤실 등의 기독시민운동의 모체가 된 목요성경공부모임, 그리고 대학촌교회의 기독선교회와 거기서 수고하시는 이종웅 장로님 등 여러분들이 서울대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며 애써 오셨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선배 교수님들의 발자취를 좇아 나에게 맡겨주신 어린 영혼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게 되었다. 

 

1997년은 하나님께서 서울대를 특별히 축복하시며 저희를 향한 크신 뜻을 보여 주신 한 해라고 생각된다. 연초에 있었던 기독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은 기독학생들과 교수들이 하나가 되어 새로 들어오는 신입생들을 신앙 안에서 형제로 맞이하는 아름다운 캠퍼스 사역의 본보기였다. 특히 이 오리엔테션을 위해 수주 동안 학생들과 교수들이 매일 아침 함께 모여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저희로 하여금 교수나 학생의 굴레를 뛰어 넘어 함께 캠퍼스 사역의 동역자로 세우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다.  이 오리엔테션을 기점으로 대학내의 각  과별 모임이 활성화되고 단과대학 모임들이 더욱 활발히 세워지게 되었다.   그리고 봄 개강예배를 통해 단기선교의 헌신하는 학생들과 교수님들을 세워주셨다. 나도 태국단기선교팀과 함께 태국의 출라롱콘 왕립대학의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주: 김병문 교수님은 97년 기독인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키타를 치며 앞장서서 학생들을 인도하여 많은 학생들이 도전을 받은 바 있었다.]    

 

<맺는 말>

 

나를 불러 주셔서 일찍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시고  지금까지 지켜 주신 은혜를 되돌아보면서, 나를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다른 분들에게도 같은 은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부족하지만 몇 자 적어 보았다. 서울대 교수가 되었다는 것이 학문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결코 ‘성취’가 아니고 다만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바뀌었다는 것뿐이라는 것을 고백한다. 또한 여기서 내가 어떻게 서며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느냐에 따라 이 자리가 축복의 자리가 될 수도 있고 또한 저주의 자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 사도바울이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라고 고백한 것처럼 나도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