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독일의 최고 영성학자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


              -       한장총 목회자교육원 원장  박봉규 목사 

 

*이글은 김영한 박사가 기독교학술원에서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는 1908년 12월 독일 북부 부퍼탈-바르멘(Wuppetal-Barmen)에서 출생했다.

어머니는 청교도적 엄격함과 신중한 분이었고

아버지는 자유분방함과 상상력의 기질을 가진 분이었다.

아버지는 높은 수준의 역사가이자 신학을 아는 신자였다.

 

틸리케가 신학을 전공하게 된 동기는 개인주의적 경건성을 보여준

모친의 영향과 그의 소원이 아들이 신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틸리케는 바르멘 인문주의 고등학교에서 라틴어를 배웠고 개혁교회 성향의 종교교육을 받았다.

 

고등학교 교감인 페퍼(Pfeffer)의 종교 강의를 좋아했고  그 교육을 통해

약자를 짓누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인문주의적 자유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인문주의적 자유정신은 후에 나치정권에 대한 용감한 저항정신으로 나타나게 된다.

 

틸리케는 바르멘 게마르케(Barmen-Gemarke)의 개혁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적으로 성장했다.

이 개혁교회는 후에 나치시절 교회투쟁을 주도했고 1933년 '바르멘 신학선언(Barmen Theologische Erklarung)'이 낭독되었던 곳이다.  당시 그 교회에서는 영적분위기로는 칼빈주의적인 냉정함이 지배했다. 신학적으로는 '능력있는 성경적 경건주의'가  주도하고 있었다. 그 교회는 춤이나 연극, 그리고 영화 관람까지 엄금하는 청교도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

 

틸리케의 입교목사는 아돌프 라우프(A. Lauff)인데 그는 목회의 중점을 강단에 두면서

매일 병자와 가난한자들 그리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방문하여 위로하였다.

라우프의 신앙과 인격은 젊은 틸리케에게 보수적이고 성경적인 신앙의 영향을 주었다.

 

틸리케는 대학생 때 호흡장애의 갑상선 종양이 있어 1929년에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후유증으로 강직경련으로 심한 고통을 받았다.

숨통을 마비시키고 죽음에 치달을 만큼 고통을 격었다. 이 고통을 통해 그는 '피조물적 불안감정'을 체험했다.

 

틸리케는 마르부르그, 엘랑겐, 본, 등지에서 철학과 신학을 계속 공부하면서 대학병원을 전전해야했다.

병의 후유증으로 심한 마비현상이 나타날 때면 걸어갈 수도 없고 몸을 구부릴 수도 없어서 휠체어에 앉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틸리케는 좌절하지 않고 엘랑겐대학의 오이겐 헤리겔(E.Herrigel)

교수에게서 <윤리적인 것과 미적인 것 사이의 관계>로 논문을 완성하여 1931년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틸리케는 1933년 성금요일 오늘날까지도 검증이 되지 않은 반신경위측 소량의 수액 AT9(Antitetanicum)을 복용해야했다. 그것은 독약(Gift) 성분이 들어 있어 일정 분량이상의 복용이 금지된 약이었다. 틸리케는 처음에는 소량을 복용했으나 고통이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절망에 빠진채 한 병을 다 마셔버렸다. 그리고 결단을 하였다. 이 약이 자신을 도와주든지 아니면 자기를 죽이든지 하라는 결단이었다. 틸리케는 이 밤에 자기의 삶에 대한 결말을 내고자 했다.

 

마침 병상침대에 마주 서 있던 십자가에 달린 주님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그에게 기적적인 치유가 나타났다. 틸리케는 자기를 만지는 놀라운 손을 느겼고

구원을 받았다는 느낌과 행복한 능력의 흐름이 그의 온 몸으로 흐르는 것을 체험했다.

 

이를 통해 틸리케는 학문적인 신앙이 아니라 실천적인 신앙이 무었인지 체험했고

여태까지그를 매어온 강단신학에서 해방되었다. 이것은 틸리케의 신앙적 사고와

신학이 복음주의적 영성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틸리케의 신학과 방법론은 이러한 구체적인 신앙의 체험이라는 영성을 통하여 형성되었다고 본다. 그의 신학적 사유에 있어서 세계의 질서 이해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신중심의 사유에 입각한 것이었다.

 

헬무트 틸리케는 현대 독일 신학자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철저히 복음적이며 종교개혁사상의 전통에 섰던 신학자였다.

 

독일의 현대 신학자들 가운데 본회퍼(D.Bonhoeffer), 칼 바르트(K. Bart),

몰트만(J Moltmann), 판넨베르그(W. Pannenberg) 등은 한국에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헬무트 틸리케는 한국에서는 아직도 낯선 신학자이다.

 

그는 현대신학의 거장인 바르트보다는 20년, 불트만 보다는  22년 연령의 차이가 있는

세대이다. 그는 당시 보수신학자 파울 알타우스(Paul  Althaus)나 고가르텐(F. Gogarten)의 친나치적인 경향과는  달리 히틀러의 나치체제를 비판하여 1939년 여름 하이델베르그 신학부 교수직에서 해임되었고 각종 강연과 설교조차 금지당한 반나치

신학자였다. 따라서 그는 본회퍼처럼 하나님 말씀 위에 서서 인간성을 말살하는 나치체제에 저항한 용기있는  보수적 신학자였다.

 

틸리케는 하이델베르그 교수직에서 해임된후 슈바베란트(Schwabeland)의 루터교

주교 테오필 부름(Theopil Wurm)이 자신의 교구로 불러 라벤스부르그(Ravensburg)

의 시골교회 목사로 부임시켰다(1940-1942). 교회사가 한스 크베스트(Hans Quest)에 의하면 이 한적한 시골의 목사관에서 "20세기 스펄전이 탄생했다고" 했다.

 

이 작은 산골 마을에서 성도들을 심방하고 같이 기도하고 매주 설교하면서  그는 그동안 자신을 지배하고 있던 소위 '강단신학'에서 벗어났다고 스스로 고백했다.  

특히 설교를 위해 말씀을 준비하고 기도하는 과정에서 그는 그동안 자신이 추구했던 신학이 얼마나 관념적이고 사변적이었는가를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신학은 말씀의 선포를 따라가야지  이 선포를 앞설 수 없다고 했다.

이런 그의 목회 경험은  틸리케의 신학형성과 영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틸리케는 설교는 이성의 현재화가 아닌 성령의 현재화라고 말한다.

신학은 학문으로서 이성의 작업화라고 말한다.

설교는 선포로서 성령의 작업이며 설교자가 먼저 성령의 역사하심에 몸과 마음을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단지 이성과 이론에서만 나오는 설교는 성령의 역사가 없기 때문에 결코 영혼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말한다. 성령의 역사가운데서 나오는 설교가 영혼을 변화시킨다고 말한다.

 

틸리케는 시골교인들이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쉬운 말과 구체적인 사건을 설명하면서 설교했다. 이러한 세심한 노력으로 젊은이들이 교회예배에 많이 참석하게 되었다. 그는 성경은 성령에 의한 말씀이기에 하나님 말씀이며 인간의 이성이나 교회의 어떤 회의가 아닌 하나님 자신이 그의 말씀을 확증하신다고 말한다.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으로 기록하게 했던 성령은 이제 설교와 신앙을 통해 다시 말씀으로 현재화 한다고 강조한다.

결정적인 것은 바로 신앙이며 믿음없이는 자연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고 깨달을 수 도 없다고 했다.

 

믿음이 없는 연구자에게 구약은 이스라엘의 신화이며 신약은 초대 기독교의 문서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런 귀한 믿음은 인간이 획득한 공로가 아니라 성령의 자유로운 행위라고 말한다. 그는 해석학적으로 말하면 성령은 해석의 영으로서 초월적인 하나님과 유한한

인간 사이에 해석학적 교량의 역활을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틸리케는 성령의 유비를 주장한다. 그는 칭의에서 철저히 수동적이듯이  믿음에서도 철저히 수동적이라고 말한다.

 

틸리케의 영성의 특징은 성령론적 착상이다. 이것은 부분적인 사유가 아니라 유기적인

사유요 전체적인 사유방식이다. 성령론적 착상은 믿음을 요청하는 사유를 중요시 한다.

그것은 계시에 의존하는 사유이다. 오직 신앙만이 하나님의 계시를 파악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안에서 우리에게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인 것이다. 성령은 현재화의 힘이요 말씀은 영의 현재화의 수단이다, 그리고 성령은 미래를 여는 하나님의 행위라고 말한다.    

 

 틸리케는 당시 20세기 중후반에 풍미하던 바르트의 보편적 기독론신학과 불투만의 실존론적신학, 틸리히의 존재론적신학을 비판하였다. 틸리케는 바르트의 신학을 "사이비 그리스도적 일원론"이라고 비판했다.

바르트의 신학은 복음과 율법을 "동일한 사실의 두 측면"으로 봄으로서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의 변증법적 긴장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초기 역사신학에서 틸리케의 성령론적 사유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명령이 수직적 질서로서 수평적인 질서에서 만나면서 인간에게 구체적인 윤리적 상황을 형성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틸리케는 종교개혁적 기독교의 전통교리를 수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현대의 상황과 관련을 지었다. 그러면서 틸리케는 그만의 독특한 종교개혁적 교의학과 윤리학을 체계화 했다. 그는 루터교의 전통에 있으면서도 현실과의 대결과 문제에 대한 상황 분석에 있어서는 개혁신학적인 사고의 틀에서 해결하려 했다. 또한 틸리케는 당시 주요 신학자들이 놓쳤던 것을 되살리기도 했다.

 

그는 바르트신학이 도외시하는 창조세계의 독자적 질서를 강조했다.

그리고 불투만신학이 도외시하는 나사렛 예수의 계시의 역사적 사실성을 강조했다.

틸리히신학이 간과하는 케리그마(kerygma)의 텍스트 중심성을 강조했다.

 

그는 현대신학이 데까르트적 사유에 지배되면서 케리그마에서 떠나간 것을 비판하고

비데까르트신학이 지나치게 전통에 집착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양자를 종합하는 신학의 새로운 사유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이 틸리케 영성의 독특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