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기쁜소식교회 김영준 목사

이 시대는 종교적인 혼동의 시대입니다. 종교만 혼동을 겪는 것이 아니고 정치든 문화든 모든 것이 혼동을 겪고 있습니다. 흔들릴 수 있는 것은 다 흔들어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 남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너희가 천기는 분별하면서 시대는 분별하지 못하느냐’고 하셨는데, 우리가 시대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불편한 현실을 바라볼 수 있어야 됩니다.

이 시대에 어떤 종교적인 흔들림이 있다는 말이냐? 다음과 같은 흔들림이 있습니다.

첫째는 성역에 대한 도전이에요. 옛날에는 부모님만이 안방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모든 사람이 안방에 들어갑니다. 성역이 없어졌습니다. 과거에 성역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에 대 하여 인간은 도전을 합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말한 마당에 더 이상 무슨 금기사항이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해서든, 성경에 대해서든, 교회에 대해서든, 모든 사람은 거기에 도전을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종교적인 룰에 대한 도전이 있습니다. 며칠 전 미국에 대법원이 동성애 결혼을 허용한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미 많은 나라에서 실행하고 있는 것이지만 충격이 큽니다. 도대체 성경적인 도덕관이 얼마만큼 지속될 수 있을 것이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느냐? 그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 

그리고 세 번째로 종교가 인류의 삶에 도움이 되느냐? 오히려 방해가 되느냐? 하는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의 존재이유에 대한 도전입니다.

도킨스 같은 사람은 종교가 모든 악의 근원이다라고 말함으로 종교에 존재이유 자체를 부정했는데, 그의 말도 일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슬람 같은 종교가 있음으로 세상이 더 평화로워지는게 아니고 전쟁과 갈등을 조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종교가 인간을 돕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해를 주고 있는 것인지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신앙을 버리고 있느냐? 그건 아니에요. 신앙에 대한 관심은 어느 때보다 많습니다. 사람들이 종교를 도전 한다는 말은 신앙에 대한 관심이 있다는 말이에요. 관심이 없다면 도전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고 하셨는데, 세상에 변화와 발전이 신앙을 불필요하게 만든 것이 아니고, 오히려 더 목마르게 만들었습니다. 과거에는 먹고 마시는 문제 때문에 하나님을 찾았다면 이제는 더 본질적인 이유로 하나님을 알고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작금의 종교적인 혼동 이후에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느냐?

첫째는 결국은 발전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봅니다. 더 나아가지기 위한 과정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끊임없이 생각하는 존재에요. 끊임없이 토론하는 존재에요. 

건강한 가정은 가족들이 모였을 때 이것저것 말다툼도 하고, 토론도 하고, 서로 의견을 말하는 집안이에요. 반대로 병든 집은 모였을 때 눈치만 보고 말하지 않는 집이에요. 서로 의견을 강하게 말한다고 그 집이 문제가 있는게 아니에요. 건강하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끊임없이 생각하는 존재요. 자기의 의견을 말하고자하는 존재요. 그러면서 배우는 존재에요. 

만일 진리가 아닌 거짓을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이라면, 생각과 토론을 금지해야 되지만 그게 아니고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라면, 인간의 생각과 토론은 진리의 그 진가가 더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북한은 생각의 자유를 금지하는 국가에요. 언어의 말의 자유를 금지하는 국가입니다. 북한이 체제에 대해서 어떻게 선전을 하던간에 자유로운 생각을 금지하고, 토론을 금지하고, 북한을 떠나려는 사람을 총으로 쏴 죽이는 한, 진리 위에 세운 나라가 아닌 것입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에요. 세계 4대 종교 중에 하나라 하는 어떤 종교는 경전의 자의적인 해석을 금지하고 무조건 따를 것을 요구하고, 만일 종교를 떠나거나 기독교로 개종하면 변절자, 배신자로 여기고 죽여도 무방하다고 가르칩니다. 그건 진리가 아니에요. 뭔가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자의로운 생각과 토론보다는 강요에 의해서만이 종교를 지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도 한 때 그럴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갈릴레오를 불러다가 지구가 자전하지 않는다고 말하라고 요구했어요. 갈릴레오가 재판장에서 나오면서 뭐라고 말했다고 했습니까? ‘그래도 지구는 돈다’ 그건 그때에요. 기독교는 이 모든 것을 소화했습니다. 기독교가 침몰하지 않을까 염려할 때가 있었지만 기독교는 침몰하지 않고 오히려 융성했습니다. 

기독교가 좁았던 것이 아니고 기독교인들이 좁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의 생각이 성장할수록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얼마나큰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변화는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 간에 알곡과 쭉정이를 나눈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의 생각과 신앙관 속에 있는 알곡과 쭉정이를 나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열심히 잘 믿는 사람이라도 그의 생각 속에는 편견과 교만과 탐욕과 거짓이 있습니다. 우리는 의인이지만 동시에 죄인이에요. 그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열심히 믿는 것 같은데 여전히 우리에게는 탐욕과 교만이 있습니다.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기도를 뜨겁게 하고 열심히 교회를 나오고 전도에 대한 열심이 있어요. 그건 장점이에요. 그러나 반대로 사회정의라든가 평등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면이 있습니다. 

반대로 진보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별로 열심히 기도하지 않아요. 별로 성경을 뜨겁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정의에 대한 열정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다 소유한 사람은 드뭅니다. 

한 예를 들면, 미국의 바이블 벨트라는 지역이 있어요. 우리가 잘 모르는 지역이에요. 한국사람들이 주로 가는 지역은 교회가 제일 적고, 기독교인들이 제일 적은 동부나 서부에요. 거기를 우리는 미국이라고 생각하는데 진짜 미국의 모습을 보려면 남부를 가야 됩니다. 텍사스라든가, 오클라호마라든가, 캔사스라든가, 조지아라든가, 노스캐롤라이나, 사울스캐롤라이나. 이 남부를 바이블밸트라고 부릅니다. 미국의 대형교회 유수한 복음전도자, 부흥사, 미국의 기독교를 지탱하는 힘이 바이블 벨트에서 나옵니다. 미국의 기독교의 힘을 보려면 바이블 벨트를 가봐야 됩니다. 

그런데 모순은 이 바이블 벨트가 과거의 노예 해방을 반대하기 위하여 남북전쟁에서 싸웠던 남부라는 사실이에요. 그들은 노예를 소외했던 사람들이고, 노예해방을 반대했던 사람들이고, 흑인에 대한 편견을 가졌던 사람들이에요. 모순이 아닙니까? 한편으로는 신앙의 뜨거움을 가진 바이블 벨트인데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인간에 대한 편견, 인간에 대한 차별을 그대로 갖고 있는 문화를 소유한 백성이었기 때문에 최근에 흑인교회에 들어가 성경 공부하던 흑인 아홉 명을 쏴 죽인 사람도 남부출신이었어요. 

이처럼 우리의 신앙에는 알곡과 쭉정이가 공존합니다. 바이블 벨트의 신앙이 가짜라는 말이냐? 아니에요. 진짜 신앙이에요. 그러나 진짜 신앙 속에도 쭉정이가 있습니다. 그만큼 인간은 제한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외부로부터의 도전이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 우리 자신의 모순을 깨달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외부로부터 충격, 도전이 있어야 사람은 자기의 속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작금의 종교적인 혼동이 우리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편견, 미움, 교만, 탐욕을 발견하고 그것을 버릴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그것은 오히려 축복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변화는 세상 사람들은 참 신앙을 찾아서 헤매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참 신앙, 참 종교, 참 진리 어떤 이들은 종교라는 단어를 싫어하고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묻는 분들이 있는데.. 그건 말장난을 하는 것입니다. 그건 마치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침대는 에이스지 과학이지 가구가 아니라면서요? 그럼 뭐라고 부르라는 말입니까?

마찬가지로 기독교가 타종교와 다르다는 것은 우리가 긍정할 수 있지만 종교라고 부르지 말아야 된다라고 하게 되면 대화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참된 종교를 필요로 합니다.

이슬람을 떠난 사람이 무실론자가 되느냐? 아니에요. 여전히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믿음을 건질 수 있는 길을 필요로 합니다. 

한때 교회를 다니다가 시험을 받아서 교회를 떠나간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느냐? 그건 아니에요. 교회는 떠나갔지만 여전히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을 보존해줄 수 있는 길을 찾습니다. 

이처럼 과거에 속했던 종교를 떠난다고 해서 신앙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진짜 진실된 종교를 필요로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짜 종교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전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에요. 할렐루야!

아마 여러분은 그 진부한 얘기 아닙니까? 이미 알고 있었던 내용 아닙니까?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그 동안에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보다는 기독교를 소개하려고 한 면이 많아요. 예수그리스도를 소개하려고 하기 보다는 교회에 데리고 오려고 한 면이 많습니다. 아무리 사람을 교회로 데리고 와도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신앙을 갖지 못합니다. 아무리 사람을 기독교에 끌어오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진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지 못합니다. 

그 차이가 무엇이냐? 예수 그리스도는 크시지만 기독교는 작아요. 예수 그리스도는 큰데 교회는 작아요. 그렇다고 기독교인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만큼 우리가 아는 만큼 믿기 때문에 나와 다른 경험,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는 전할 수 있는 예수님에 한계가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내가 아는 기독교에 사람들을 끼워 맞추려고 합니다. 내가 경험한 신앙의 사람들을 끼워 맞추려고 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끼워 맞춰집니다. 그러나 자기 개성이 강하다든가, 독립심이 강하다든가,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은 잘 끼워 맞춰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들이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탓하려고 하는데 그게 아니고 내 틀이 좁아서 그런 것이고, 내 생각이 좁아서 그런 것이고,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크십니다.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그 크신 팔에 안기세’ 예수님은 크신 예수님이에요. 하도 커서 우리가 다 깨닫지 못하는 면이 있는 것뿐입니다.

왜 기독교에 수많은 교단이 존재하느냐? 그냥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가톨릭 이 넷으로만 제한하면 좋을 텐데 그 이외에 뭐 루터교니 성공회니 장로교도 합신이 있고, 통합이 있고, 합통이 있고 왜 이렇게 많은 교단이 필요하냐? 왜 이렇게 많은 교회가 필요하냐? 그 이유는 한 두 교단으로는 예수님의 크신 진리를 다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이 크시기 때문에 천주교가 잘 대표하는 진리가 있고 개신교가 잘하는 부분이 있고 개신교 중에도 장로교가 잘하는 부분, 순복음이 잘하는 부분, 또 타종파가 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합하여 우리가 좀 더 균형 잡힌 예수님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크신 분이에요. 

세상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예수님이에요. 여러분 예수님의 참 모습을 알아서 예수님을 싫어할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나를 알아서 나를 싫어할 사람은 많아요. 아마 여러분도 마찬가지일거에요. 여러분의 참 모습을 알면 싫어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님의 참 모습을 알 수 있다면 예수님을 거부할 사람은 적을 것이라고 봅니다. 당장 교회 등록하지는 않을 거예요. 당장 자기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지는 않을지라도 예수님을 알 수만 있다면 예수님을 거부할 사람은 적어요. 그 이유는 예수님만이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본문말씀에 13절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한번 따라 해보세요.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그 말은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는 말이에요. 이보다 더 큰사랑은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것은 예수님이 당신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당신의 친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많은 사상, 많은 철학을 가르친 사람들은 말로 승부를 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실천으로 옮겨서 당신의 목숨을 희생함으로 그 진리를 증거하셨어요. 예수님 같은 분이 없어요. 모든 사상과 철학가들은 대접을 받으려고 했지만 예수님만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기려 하고 도리어 자기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라’ 이처럼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고 섬기러 오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종교적인 혼동이 있지만 그것이 우리로 우리의 믿음을 위축시키게 하면 안됩니다. 우리의 교만이 위축되게 하는 건 좋아요.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위축되게 하면 안됩니다. ‘아, 내가 예수 믿는 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을까봐’,’아, 내가 예수님을 말하면 배타적인 사람이 될거야’,’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사람들이 싫어 할거야’이런 것은 세상의 혼동이 우리의 믿음을 위축시키게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더 담대해 져야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이외에는 우리가 구원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진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개시하셨습니다. 그 진리를 개시하신 것이 바로 사랑이에요. 사랑. 사랑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증거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오늘 본문에 말씀 아닙니까?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더 큰사랑은 없죠. 예수님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예수님보다 더 크게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실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버리면 그 이외에 길이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

그러므로 이 혼동의 시대에 예수님은 어느 과거 어느 때보다도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구원을 우리가 반드시 목격할 것입니다. 할렐루야!